[답사 첫 날]

2007년부터 시작된 17기 문화유적답사가 햇수로 19년차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자 진행한 국내답사가 40회를 기록하였으니 뿌듯한 마음이다. 50대 초반에 시작해 올해로 칠순의 나이가 되었으니 삶의 여정에서 느끼는 자부심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행사들이 그리 만만하게 진행된 건 아니다. 행사 초기부터 적극 도움을 준 동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 일처럼 생각하며 적극 동참해 주고 홍보해 준 동기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문화유적답사는 답사지 선정에서부터 행사일정과 답사유적 안내, 차량, 식사와 숙소 등 사전에 준비할 사항들이 많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의 혼자서 준비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은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고달파도 역사학도로서의 사명감으로 버텨낸 것이 사실이다. 학부에서 한국사를 전공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은행원생활을 하면서도 전공을 살릴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내가 역사학을 전공을 택한 계기도 위로 다섯 분의 형님들을 보면서, 전공과 세상살이가 직접적 연관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삶이 그럴 바에야 전공이라도 하고 싶을 걸 하자는 생각으로 역사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시 예상한대로 전공과는 무관한 은행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10여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고자 시작한 역사기행이 다시 전공에 대한 애착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지금의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10년째 지내다 보니 이제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다소 무리가 따른다. 게다가 순발력도 떨어져 이제 17기 공식행사로서의 답사는 올해 두 번의 답사로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그래서 올해는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영남지역과 호남지역을 1박2일로 답사할 계획을 세웠고, 이번에 산청, 진주, 함양지역의 문화유적을 돌아보는 기회로 준비했다. 대한민국 어느 곳을 가도 귀에 익숙한 지명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 지역들을 찾아가는 건 사실 쉽지 않다. 나도 이번이 네 번째 지역순례이기는 하지만 그곳을 다녀온지는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만큼 대힌민국도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게 현실이다.
사전답사도 없이 오로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넷을 통해 일부 변화된 내용만 확인하고 바로 일정을 잡고 한달 전 홈페이지와 카톡방을 통해 공지를 하였다. 과연 성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초기의 우려와 달리 최종적으로 26명이 참여하는 적정수준의 참여인원을 확보하였다.
4월 초.중순 나의 칠순을 축하해주는 형수님의 권유로 5명이 남프랑스 여행을 다녀온 후 일주일 간 많은 시간을 들여 유적지에 관한 학습을 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열심히 준비를 하였다.
4월 24일 수도권 참가자 22명은 7시30분 서울을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거쳐 첫 번째 답사지인 문익점 선생 면화시배지에서 대구팀 4명과 만났다. 고려 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 선생이 당시 인도로부터 면화를 들여와 재배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면화씨 10톨을 붓뚜껍에 숨겨와 장인 정천익에게 심도록 하였는 바, 오로지 한 톨에서 싹이 나 그 해 100여 개의 면화씨를 받았다. 그리고 3년 후에 이를 전국에 보급하여 기르게 되었으니 가히 의류계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귀족들은 명주(비단)옷을 서민을 삼베옷을 입었다. 이제 서민들도 따뜻한 무명옷을 입고 솜이불을 덮을 수 있다는 건 가히 혁명적 변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음은 남사예담촌을 찾았다. 원래 흙돌담이 아름다운 700년 이상 된 마을인데, 20세기 초에 지어진 허세로 가득 찬 건물에 집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드높은 돌담장이 눈에 거슬린다. 그래도 정몽주 후손의 사양정사, 태조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영모재, 효자 이윤현의 사효재는 돌아볼 만한 건물들이다.
이곳 남사예담원에서 매화정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홍석동기가 흰 색깔의 백설딸기를 구입해 밥상에 올렸다. 맛이 특별하지는 않았으나 흰색 딸기라는 것이 이채롭다.
이어서 산청의 자랑이자 자부심의 근원인 남명 조식 선생 유적을 찾아 출발했다. 3월 하순 발생한 산불로 불탄 나무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지만 그래도 신록이 우거지니 처참했던 그 모습이 조금은 누그러진 모습이다. 산불로 희생당한 진화대원의 명복을 빈다.
남명기념관에 도착하였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성 문화해설사가 쫓아와 “어디서 왔냐”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지난 달 산불피해 이후 단체여행객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한다. 요즘 문화해설사는 초창기와 달리 꽤나 자신이 담당하는 문화유적에 대하여는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 설명을 들어보는 게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우리 답사팀이 원하는 해당 내용 즉, 남명 선생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좋으련만 산청의 역사부터 시작해 구구절절이 이야기를 하려하니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게 된다. 부득이 “우리가 산청뿐만 아니라 진주와 함양까지 돌아볼 예정이어서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말로 설명시간을 줄여줄 것을 요청했다.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처사로 살아가며 당대 최고의 주자학적 이론은 물론 다양한 학문을 즐긴 남명은 유교의 기본덕목인 ‘仁’과 ‘義’ 중에서 ‘義’를 더욱 중시한 학자다.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1년 먼저 세상을 떠난 퇴계 이황이 이론을 중시한 유학자라면 남명은 실천을 중시한 유학자다.
기념관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남명선생의 초상화와 그가 평소 몸에 지니고 다녔던 ‘성성자’와 ‘경의검’이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성성자’ 방울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늘 깨어 있기 위해 노력했으며, “敬’과 ‘義’를 위해 언제라도 목숨 바칠 각오로 지니고 다니던 칼이 ‘경의검’이다.
그가 언제나 단호하여 조정으로부터 단성현감이라는 첫 벼슬을 제수받자 이를 거절하며, 문정왕후를 과부로 아들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것이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1572년 그의 죽은 후 20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제자 1백여 명이 의병으로 참여하였고, 이 중 잘 알고 있는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정구 등 50여 명은 전란 중 맹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스승의 강직함과 올곧음을 이어받아서인지 대부분의 제자들이 동인에서 강성 북인으로 광해군을 지지하면서 인조반정에서 몰락하는 바람에 남명의 학문적, 현실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많이 위축되었다.
기념관 뒤를 돌아서서 산길을 5~6분 정도 오르면 남명 선생의 묘소가 보인다. 앞쪽에 숙부인 묘가 있고 뒷쪽으로 남명선생 묘와 성운의 쓴 묘갈문이 있다.  숙부인 은진송씨는 이 곳 산천재에 기거할 때 맞이한 부인이며, 첫 부인인 정경부인은 남명 선생이 김해에서 합천으로 합천에서 이 곳으로 오실 때 따라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후손은 숙부인에게서 난 자손들이라고 하니 지금의 관점으로는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묘소에 제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또다른 3개의 묘비가 있다. 6.25전쟁 중에 입은 총탄의 흔적이 묘비마다 역력하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의 활동이 여기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랫쪽으로 내려와 기념관으로 들어가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신도비문을 살펴보고, 길을 건너 산천재를 향했다. 합천의 삼가면 뇌룡정에 기거하며 지리산을 무려 12차례나 올랐던 남명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지리산에 오를 수 없게 되자 아예 이 곳으로 이사해 후학들을 가르치며 매일 지리산 천황봉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지리산은 남명에게는 전적으로 의지할 큰 종과 같은 존재였다고 하겠다. 산천재에는 서재를 짓지 않아 천왕봉을 잘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자그마한 매화 한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도 자라고 있어 이를 ‘남명매’라고 부른다. 
산천재에는 중국 요순시대의 고사인 허유와 소부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느 날 요임금이 허유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받아달라 하자, 이를 거절하고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들었다며 냇가에서 귀를 씻고 있었다. 친구인 소부가 소를 몰고 물을 먹이러 왔다가 허유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러자 소부는 소를 끌고 다시 상류로 올라갔다. 허유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더러운 소리를 듣고 씻은 그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어 위로 간다고 했단다. 요임금 같은 성군도 인재를 모시는 게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고 자신의 처신을 허유와 소부에 빗댄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산천재를 나와서 이제 덕천서원을 향했다. 덕천강을 따라 난 도로의 오른쪽으로 홍살문이 보이고 4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외삼문 안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대칭으로 마주하고 앞쪽으로 깔끔하고 안정돼 보이는 정면 5칸의 ‘경의당’이라는 강당이 보인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남명과 그의 애제자 최영경을 함께 모시고 있다.
남명 사후 5년(1576)에 제자들이 덕산서원으로 세웠으며, 광해군 때(1609)사액을 받았다. 하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 따라 사라졌다가 1930년대에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록의 계절에도 깔끔한 모습이지만 한여름 배롱나무가 만개하면 더욱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래 전 이곳에 왔을 때 은행잎이 서원마당에 깔려 일행들이 은행잎을 날리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조선시대 서원과 향교의 기능과 구조 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며 관람하였다. 쉽게 설명하면 사립대와 공립대의 역할을 하였고, 교육과 제사를 겸하는데, 지형이 평지일 경우에는 ‘전묘후학’으로 경사지일 경우는 ‘전학후묘’의 형식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이는 성현을 모신 대성전이나 사당을 강학공간보다 낮은 곳에 둘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설립 당시의 규모가 소위 삼산서원(덕산, 도산, 옥산) 중에서 가장 컸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주 단촐한 규모로 재건되었을 뿐이다. 길 건너편 강가에는 남명선생이 자주 찾았다는 ‘세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탁해진 마음을 씻고 다스린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제 덕천서원을 나와 나도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단속사지를 향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대부분의 절터를 찾을 때 ‘단속사터’ 이렇게 입력하면 검색이 되질 않는다. ‘단속사지’라고 쳐야 검색이 된다. 이는 문제가 많다. 왜 우리말로 치면 검색이 안된단 말인가? 한자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간단한 용어조차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는데 이 사례는 문제가 있다.
되돌아 나온 길의 남사삼거리에서 7km정도 들어가 단속사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절터로 걸어 들어가니 경남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진우 동기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사업차 바쁜데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다. 간단하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말기의 불교에 관한 설명을 하고 이곳의 유물인 삼층석탑을 배경으로 단체사진 촬영을 하고 정당매로 불리는 오래된 매화나무를 감상했다.
일부러 찾아온 이진우 동기가 업무가 바빠서 가봐야 한다며 차량 가득 싣고 온 단감빵을 내주며 간식으로 먹으면 괜찮다고 한다. 답사때마다 동기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도 고맙기 짝이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이 동기를 배웅하고 우리는 산청화재 때 고생한 소방헬기장을 향했다.
얼마전까지 이곳에 근무했던 박순남 동기는 며칠 전 강원도 고성군으로 전출됐다. 너무 정신없이 일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전화도 못했는데, 만나볼 수 없게 되어 미안하다며 딸기를 좀 준비해 놨으니 그 곳을 방문하고 딸기도 받아가라고 연락이 왔다.
차를 몰아 수곡면사무소 소재지로 가 고생한 산불진화에 고생한 헬기조종사들에게 선물할 건강음료를 2상자 준비했다. 창촌교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에 ‘진주 농민항쟁 기념탑’이 있다. 이번 답사여행에서 단성향교와 더불어 진주농민항쟁의 상징물이다. 1862년 이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이 바로 갑오농민항쟁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부패한 조정과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이 항쟁을 일으켜 이 일대 60개가 넘는 마을로 확대되었다. 부패한 관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과 진주목사 홍병원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안핵사 박규수는 백낙신 등을 처벌함으로써 민란을 종식되었다.
다리를 건너 박순남 동기가 미리 준비시켜 놓은 딸기 두 대야를 인수하고 헬기장으로 갔다. 10여 이상이 탈 수 있는 대형 헬기로 트럼프 대통령이 타던 기종과 동일하다고 한다.  지난 달 산불에서 맹활약을 했지만, 조종사들 말로는 강풍 속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건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번 산불진압에서도 안타깝게 조종사도 희생을 당했다. 설명을 듣고 헬기에 올라서 사진도 찍고 감사인사를 한 후 진주로 향했다.
진양호를 끼고 돌아가는 길은 무척 아름답다. 얼마 전 다녀온 남프랑스의 전원풍경보다 훨씬 사랑스럽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것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더불어 산하의 모습도 예전과 달리 아름다운 곳이 참 많다. 이는 소위 말해 국뽕이라는 개념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아니다. 수많은 여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실체적 진실이다.
진주시내의 소문난 식당 중 천황식당이 있다. 전주비빔밥에 비견되는 진주비빔밥으로 유명한 곳이다. 가장 인기있는 메뉴는 육회비빔밥이다. 이와 더불어 육전을 추가하여 맛있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골든튜립남강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는 그야말로 만원이었다. 대만의 단체관광객이 버스로 몰려오면서 빈 방이 없어 남자동기들끼리도 더블베드에서 자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짐을 풀고 많은 인원이 진주의 야경을 보러 남강을 따라 진주성으로 향했다. 야간개장으로 진주성에 들어갈 수 있어 그윽한 야경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답사 첫 날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