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둘쨋 날]

7시에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식사를 시작하여 끝낸 후, 가방을 차에 실어놓고 8시30분에 걸어서 진주성으로 갔다. 거의 대다수가 65세 이상이어서 문화재 관람료는 부담하지 않는데, 입장료를 따로 징수하지도 않는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는 왜군이 호남으로 가는 교두보가 되어 반드시 지켜야 중요한 거점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시작된 왜의 공격은 놀라운 속도로 진격하여 20여일만에 한양까지 점령해 버렸으나. 다행히도 바다는 사전에 철저히 군사대비태세를 강화한 이순신 장군에 의해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대첩의 승리까지 정말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관군의 연전연패와 달리 6월 이후에는 의병들의 맹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났다. 사천전투 승리로 진주목사가 된 김시민 장군은 10월 4일부터 일주일간 치룬 진주성 1차 대첩에서 3천8백여 명의 군인으로 무려 3만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놀라운 전략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최경회, 곽재우 등 의병장들의 합세로 사기가 오르면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김시민 장군은 적의 총탄을 맞고 얼마 후 순국하였다.
이에 열받은 도요토미가 다음해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직접 명령하여 6월 22일부터 일주일간 왜란 중 최대 규모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져 일대의 백성을 비롯한 6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나 실제 군사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최대한 많이 잡아도 1만여 명의 정도로 추정할 뿐이다. 이에 비해 왜군은 무려 10만 명이 훨씬 넘었다고 하니 애초부터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많은 지휘관들이 성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으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김천일, 최경회, 황진, 장윤 등 전 장수가 장렬하게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의로운 여인이 바로 논개다. 그녀는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군의 승리축하연에서 왜장을 유인해 남강 가의 의암에서 전 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 그를 껴안고 물로 뛰어들어 익사시켰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과거의 기록상으로 볼 때 신분이 불분명한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고 이후 지금까지도 다양하게 각색되어 우리를 점점 혼란스럽게 한다. 늘 느끼는 혼란이지만 ‘역사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 사이에서 그 한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제단에서 함께 머리 숙여 참배하고, 주변을 돌아본 후 촉석루에 올랐다. 현 건물은 안타깝게 6.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을 복원해 국가문화재로 등록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남원의 광한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누각을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논개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의암이 나온다. 원래 위암이라 불렀는데 논개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 의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계단을 다시 올라 모퉁이를 돌면 의기사에 논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알려진 이당 김은호 화백의 그림이 있었는데, 2005년 진주의 시민단체에서 논개의 영정을 그런 사람에게 그리게 한 건 치욕이라며 떼어내고 다른 영정으로 바꾸어 버렸다. 사실 김은호의 그림은 춘항사나 아랑각에 걸린 그림과 얼굴이 거의 유사해 영혼없는 그림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제 진주성을 거닐어 국립진주박물관을 향했다. 인터넷을 통해 단체관람을 신청하고 문화재해설사의 해설도 의뢰해 놓았다. 그런데 이곳에는 나의 대학 후배이자 손주사위로 학예사인 이효종이 10여 년 전부터 근무하고 있다. 이번에 미리 통화를 해 오늘 보기로 했는데, 다음 달에 있을 특별기획전시회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전화도 못받고 있다. 박물관 해설을 듣는 중에 후배가 찾아와 겨우 인사를 나누었다. 
직접 해설을 해야 하는데 여건상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해설을 맡으신 분도 실력이 쟁쟁한 것 같다. 1시간 정도 해설을 부탁했는데, 차분하고 상세하게 잘 설명하신다. 바깥양반이 ROTC 6기 선배님이라고 해서 더욱 반가웠다. 1시간가량 임진왜란과 진주대첩 그리고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설명을 잘 듣고 박물관을 나와 버스로 단성을 향했다.
점심을 예약한 성화식당에 대한 정보가 없어 다소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도착해 보니 식당규모도 제법 크고 깔끔해서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음식도 정갈하고 맛이 괜찮아서 돼지불고기로 맛있게 점심식사를 마쳤다.
어제 뉴욕에서 귀국해 곧바로 이곳으로 온 박창현 동기가 시차적응 문제도 어렵고 부모님도 찾아뵙지 못했다며 아쉽지만 대구로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차량 한 대로 왔기 때문에 4명이 함께 대구로 향하고 서울팀은 산청의 전구형왕릉을 향해 출발하였다. 전구형왕릉이라 한 건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전해오는 이야기라는 뜻을 가진다. 논산의 계백장군묘도 원래 전 자가 붙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전 자를 떼어 버리고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사실 이런 유물들이 꽤 있다. 목적지에 가는 도중에 동의보감한방촌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는데, 다소 궁금하기는 했지만 일정상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10대왕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에 절대 기여한 김유신 장군의 증조할아버다.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신라의 법흥왕에게 항복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이 나온다. 비록 진골의 품계를 받았지만, 신라의 토착귀족에겐 멸시를 받았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신라통일의 중심인물이 된 김유신이 참 대단한 인물이다.
산 속 깊숙이 위치한 전구형왕릉은 돌을 쌓아 만든 특이한 형태다. ‘한국의 피라미드’라는 별칭이 붙었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이집트나 멕시코의 피라미드에 비하면 그야말로 애들 장난수준에 불과하다. 그것도 돌을 잘라 규격을 맞춘 그 피라미드와 달리 단지 돌을 쌓아놓은 것이니 그냥 비교불가다. 차라리 중국 지안의 장군총을 그리 부르면 그런대로 이해는 할 수 있겠으나 이건 아닌 것 같다.
이제 다시 함양의 남계서원과 정여창 고택 등을 향했다. 영남의 선비문화는 ‘좌 안동 우 함양’이라 할 정도로 함양도 만만치 않은 문벌의 고장이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여창이다. 조선 전기의 학문은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해 도입된 주자학이 이제현을 시작으로 이색, 정몽주, 길재로 이어진다.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와 그 아들 김종직 그리고 김굉필, 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주자학 기반의 사림세력들은 소위 진보적 입장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계유정난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훈구파들과 대립해 왔다.
사림파들이 대거 등장한 성종시대를 지나 연산군이 집권하면서 사림과 훈구세력의 대립이 정점에 달하게 된다. 이 때 사관으로 있던 사림파의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세조의 단종 살해와 관련된 글인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이극돈에 대한 부정한 행동이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드러났다. 위기를 느낀 이극돈과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이 연산군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연산군은 임금도 절대 볼 수 없는 사관의 사초를 보면서 피바람이 불었다. 이것이 바로 4대사화의 시작인 무오사화다. 수많은 사림의 선비들이 화를 당했는데, 주자학의 계보를 잇는 스승과 제자관계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게 된다. 정여창 역시 김종직의 제자였기 때문에 화를 당하여 유배를 가게 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연산군이 간신 임사홍의 이간질로 자신의 어머니가 사약을 받은 것에 분노해 일으킨 갑자사화로 다시 부관참시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후 또 한 번의 사화를 거치며 분노를 느낀 선비들이 연산군의 악행을 저지하고자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반정의 성공으로 사림세력이 다시 정권의 전면에서 활약한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서 화를 입은 수많은 사림들이 신원 되고 복권이 된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인데 지나치게 강성이어서 임금조차도 불안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기묘사화가 발생하고 다시 사림들이 화를 입는 상황이 재발되었다.
어쨌든 정여창도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동방오현으로 불리며 문묘에도 종사되었다. 우리가 찾은 남계서원이 바로 정여창을 배향하였는데, 명종 7년(1552)에 세워져 명종 21년(1566)에 백운동서원에 이어 두 번째 사액을 받아 후학을 양성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정문인 풍영루를 지나면 바로 보이는 강당인 명성당 앞을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의 뒤쪽 계단을 오르면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 앞에 놋대야가 있는 곳에 처음 보는 한자가 있어 확인 결과 관세위(盥洗位)임을 알았다. 제관이 의식을 진행하기 전에 손을 씻는 대야라고 한다. 윗쪽에서 내려다보는 서원전경과 남계천이 내려다 보이는데 경치가 아주 좋다. 건물이 소박하지만 주위와 아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는 맛이 아주 즐겁다.
남계서원 바로 옆에는 김일손을 배향한 청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고 교유했으나, 14세 연상인 정여창을 절대 흠모하여 1495년 이 곳에 와서 청계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마할 정도였다. 그는 주로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를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그가 사관으로 있을 때 이극돈의 불의한 행동을 지적하여 기록하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발생하니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사림들이 엄청난 화를 입게 되었다. 청계정사도 폐사되었다가 1917년에 남계서원에서 땅을 일부 내어주어 청계서원을 지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이번 답사의 마지막 일정인 정여창 선생이 태어나 자란 일두(一蠹-좀벌레)고택을 찾았다. 네 번째 찾아왔지만 18년 만의 방문이다 보니 동네 길이 확 바뀌어 잠시 혼란을 겪었다. 고택의 솟을대문 양쪽으로 ‘일두고택’과 ‘충효전가’라는 팻말이 보이고, 문 윗쪽에 무려 다섯 개의 정려가 걸려있다. 그 중 한 개는 충신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네 개는 효자와 관련된 것이다. 명문가 집안이면서 충과 효를 깊게 실천한 대단한 가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정갈하게 자리하고 있다. 역시 ‘문헌세가’라는 현판과 ‘충효절의’라고 쓴 멋진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를 끼고 돌면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고, 문을 들어서면 탁 트인 안채가 넓게 자리하고 왼쪽으로 우물이 보인다. 안채는 일반적인 영남의 고택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2003년 이곳에 왔을 때 아랫채가 원인 모를 화재로 손상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다행히 잘 복구되었다. 대체로 양반가의 저택은 누대에 걸쳐 증축되고 넓혀져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전통가옥을 관리하며 사는 후손들에게 우리는 늘 고마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대의 흐름이 편의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보니 누구도 한옥을 관리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번 봄답사 1박2일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 통영대전고속도로 지곡IC가 있어 쉽게 진입해 3시간 조금 더 걸려 서울까지 올 수 있었다. 금요일 퇴근시간대가 되었음에도 거의 막히는 구간없이 원활하게 올 수 있었다. 버스에 새로운 영상시스템을 설치했다는데 준비해 간 동영상 자료를 시청하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전반적인 일정은 아주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해주니 답사를 주관한 나도 기분이 아주 좋다.